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단순히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가며, 한 도시의 공기와 속도에 동화되고, 문화와 삶의 질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리투아니아(Lithuania)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매력을 지닌 나라입니다.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발트 3국 중 하나인 이 나라는, 유럽이지만 유럽의 주류에서 살짝 벗어난 듯한 독특한 감성으로 디지털 노마드들에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에스토니아의 e-Residency나 라트비아의 리가를 먼저 떠올리지만, 리투아니아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는 점에서 오히려 디지털 노마드의 희소한 거점으로 적합한 국가입니다. 조용하고 저렴한 도시, 탄탄한 디지털 인프라, 그리고 점차 확장되는 원격근무자 커뮤니티까지. 이번 글에서는 리투아니아의 디지털 노마드 체류 프로그램과 실제 체류 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리투아니아의 디지털 노마드 체류 방법 — 공식 비자 제도는 없지만 대안은 있다
2025년 현재, 리투아니아는 '디지털 노마드 비자'라는 명칭의 공식 제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노마드가 리투아니아에서 합법적으로 머무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리투아니아는 유럽연합(EU)과 솅겐 협정에 가입된 국가로, 솅겐 국가와 무비자 협정을 맺은 국가의 국민은 최대 90일까지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이 조건에 해당하므로, 단기 체류는 자유롭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긴 체류를 원한다면 두 가지 대안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1. 자영업자 또는 프리랜서 형태의 임시 거주 허가(Temporary Residence Permit)
리투아니아는 외국인이 현지에서 사업 활동(예: IT 프리랜서, 디자인, 콘텐츠 제작 등)을 하는 경우,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1~2년간의 거주 허가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는 디지털 노마드에게 가장 현실적인 방식입니다.
필요한 조건은 △확실한 수입원(월 약 2000유로 이상) △해외 클라이언트 계약서 △현지 주소지 확보 △건강보험 가입 △무범죄 증명서 등이 있으며, 모든 서류는 리투아니아어 번역 및 공증이 필요합니다.
2. 유럽 스타트업 비자 활용(Startup Visa Lithuania)
디지털 노마드 중에서도 자신의 비즈니스 모델이나 앱, 플랫폼 등을 보유한 스타트업 운영자라면, 리투아니아의 ‘스타트업 비자’를 통해 장기 체류 및 기업 설립이 가능합니다.
이는 정식 체류 허가뿐 아니라, 사업 인프라 제공, 초기 컨설팅, 세금 혜택 등이 포함되어 있어 기술 창업형 디지털 노마드에게 적합한 경로입니다.
두 방식 모두 행정절차는 까다로운 편이지만, 리투아니아 내 한인 행정 전문가나 현지 에이전시를 통한 대행 서비스가 활성화되어 있으므로 큰 진입 장벽 없이 진행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비자 체류로 90일을 넘길 경우 솅겐 협정 위반으로 간주되니 반드시 비자 승인 후 체류를 연장해야 합니다.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도시 — 빌뉴스, 카우나스, 그리고 해안 도시 클라이페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Vilnius)는 유럽에서 가장 저렴한 수도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단지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디지털 노마드에게 추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뉴스는 중세 유산과 현대 IT 산업이 공존하는 도시로, 고요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갖추고 있으며, EU 전역에서 온 원격 근무자들이 모여들고 있는 곳입니다.
빌뉴스에는 ‘Workland Vilnius’, ‘Spaces’, ‘Tech Park’ 등 다양한 코워킹 스페이스가 있으며, 대부분 초고속 와이파이, 회의실, 커피바, 커뮤니티 이벤트를 제공하고 있어 생산성 있는 하루를 보내기에 충분합니다.
물가도 매우 합리적입니다. 도심 원룸 임대료는 월 400-600유로, 대중교통 월 정기권은 30유로 내외, 커피는 1.52.5유로 수준입니다. 아침 9시에 고즈넉한 골목의 카페에서 시작해, 점심엔 한적한 공원에서 산책하며 머리를 식히고, 오후엔 코워킹 오피스로 돌아오는 일상은 디지털 노마드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루틴과 가깝습니다.
한편 카우나스(Kaunas)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이자, 청년문화와 대학가 중심의 활기찬 분위기를 지닌 곳입니다. 빌뉴스보다 조용하고, 상대적으로 더 저렴한 물가 덕분에 예산이 한정된 노마드들에게 적합합니다. 예술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등 창작 기반 프리랜서들이 자주 선택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보석은 클라이페다(Klaipėda)입니다. 발트해와 맞닿은 항구 도시로, 해안의 여유와 도심의 인프라가 공존하는 환경에서, ‘디지털 노마드 by the sea’라는 새로운 감성을 누릴 수 있는 도시입니다. 주말이면 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노트북을 펴고, 평일에는 조용한 아파트에서 작업하며 생활의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리투아니아 체류 전 반드시 준비해야 할 현실 체크리스트
디지털 노마드로서 리투아니아에 체류하기 전, 반드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핵심 포인트가 있습니다.
1. 언어와 행정 시스템
리투아니아는 공공기관에서 영어가 통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행정 문서와 절차는 리투아니아어로만 처리됩니다. 특히 비자 관련 행정이나 계약서 작성 시 공식 번역 공증본이 필수이며, 번역비와 인증비는 미리 예산에 반영해야 합니다.
2. 건강보험 및 의료 시스템
리투아니아는 공공의료가 잘 발달되어 있으나, 외국인의 경우 대부분 민간 건강보험 가입이 요구됩니다. 보험 가입 시 ‘리투아니아 체류자 대상 보장 범위’가 포함된 상품을 선택해야 하며, 체류 허가 신청 시 해당 서류를 반드시 제출해야 합니다.
3. 세금 및 소득 보고
리투아니아에 183일 이상 거주할 경우, ‘세법상 거주자’로 간주되어 소득세 부과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리투아니아는 한국과 이중과세 방지 협약을 체결하고 있으므로, 본국에서 세금을 납부한 기록이 있다면 중복 납세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하며, 현지 회계사와의 상담이 추천됩니다.
4. 솅겐 체류 일수 주의
솅겐 비자는 180일 기준으로 최대 90일까지 체류가 가능하며, 이를 넘기면 추방이나 재입국 제한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장기 체류를 원하는 경우, 반드시 사전 비자 승인 후 입국 또는 현지 외국인청에 등록을 완료한 상태여야 합니다.
5. 계절과 의복
리투아니아의 겨울은 춥고 어둡기로 유명합니다. 평균 영하 10도 내외, 해가 짧은 시기가 이어지므로, 겨울철 체류를 고려한다면 적절한 방한 장비와 실내 작업환경 확보가 중요합니다. 대신 봄과 여름은 따뜻하고 청명해, 야외 작업이나 소도시 여행에 적합한 시기입니다.
맺음말: 조용한 나라에서 나만의 리듬을 회복하는 법
리투아니아는 떠들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디지털 노마드에게 꼭 필요한 리듬과 깊이, 균형과 공간이 존재합니다. 복잡한 대도시에서 벗어나 창작과 몰입, 휴식과 사색을 동시에 누리고 싶다면, 리투아니아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스타트업 비자와 자영업 거주 허가라는 두 가지 루트를 통해 장기 체류가 가능하며, 예산 부담 없는 물가와 발트해의 고요한 풍경, 역사와 기술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진정한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북유럽도 아니고, 동유럽도 아닌 그 경계의 땅에서 당신만의 새로운 일상과 시간을 시작해보시길 바랍니다. 리투아니아는 그런 삶을 조용히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